
왜 우리는 타인의 고통을 듣자마자 책임부터 묻게 되었을까
“누가 칼 들고 협박했냐.”
인터넷에서 누군가 자신의 힘든 처지를 호소하면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말이다.
자신이 선택한 직업이 힘들다고 해서 그 책임을 사회에 돌릴 수는 없고, 투자나 사업의 실패 역시 특별한 외부의 범죄적 개입이 없다면 기본적으로 선택한 사람의 책임이다.
나는 이 말이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이 말의 타당성과는 별개로, 타인의 고통을 마주했을 때 가장 먼저 꺼내는 말이 되는 것은 다르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왜 타인의 고통보다 먼저, 그 책임부터 따지게 된 걸까.
누군가는 자신의 일이 힘들다고 말한다.
그러면 그것을 듣는 사람은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안 힘든가?”
누군가는 월급이 적다고 호소한다.
그러면 다른 누군가는 자신보다 많은 월급을 받으면서 왜 힘들다고 하느냐고 반문한다.
누군가는 집값 때문에 힘들다고 말하고, 누군가는 집이라도 가지고 있으면서 무슨 불평이냐고 말한다.
각자의 말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문제는 우리 사회에서 누군가의 고통이 등장하는 순간, 그것을 이해하기 전에 서로의 고통을 비교하는 일이 먼저 시작된다는 것이다.
고통이 공감의 이유가 아니라 경쟁의 단위가 된다.
“당신도 힘들구나.”
가 아니라,
“내가 더 힘들다.”
가 되는 것이다.
어쩌면 이것은 사람들이 타인의 고통에 무심해졌기 때문만은 아닐지도 모른다.
오히려 사람들이 너무 오랫동안 자신의 삶을 버티느라 지쳐 있기 때문일 수 있다.
하루 종일 일하고도 삶이 크게 나아지지 않고, 미래에 대한 불안은 사라지지 않으며, 자신의 어려움 역시 누구에게도 충분히 이해받지 못했다고 느끼는 사람에게 타인의 고통은 또 하나의 부담으로 다가온다.
누군가 “나도 힘들다”고 말하는 순간, 그것은 단순한 사실의 전달로 끝나지 않는다.
“이해해 달라.”
“배려해 달라.”
“내 상황을 고려해 달라.”
라는 요구가 뒤따를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면 사람은 본능적으로 선을 긋는다.
“그건 당신이 선택한 일이잖아.”
‘누칼협’은 그런 의미에서 단순한 조롱이라기보다 일종의 경계선일 수 있다.
당신이 힘들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고통에 내가 책임질 이유까지는 없다는 선언이다.
그래서 나는 이 말 자체를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문제는 이런 방어가 사회 전체의 기본 언어가 되었을 때다.
누군가 힘들다고 말할 때마다 먼저 책임을 따지고, 선택을 따지고, 더 힘든 사람을 찾아내기 시작하면 결국 누구도 자신의 고통을 말하기 어려워진다.
왜냐하면 세상에는 언제나 나보다 힘든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직장인이 힘들다고 말하면 취업하지 못한 사람이 있고,
자영업자가 힘들다고 말하면 폐업한 사람이 있고,
월세가 힘들다고 말하면 고시원에 사는 사람이 있으며,
누군가 삶이 힘들다고 말하면 그보다 훨씬 어려운 삶을 살아가는 사람을 얼마든지 찾아낼 수 있다.
그 기준을 끝까지 밀어붙이면 고통을 말할 자격이 있는 사람은 거의 남지 않는다.
여기에는 또 하나의 감정이 숨어 있는 것 같다.
“나는 견뎠는데 왜 당신은 견디지 못하느냐.”
자신도 힘들었지만 누구에게 특별한 배려를 요구하지 않았고, 누구도 자신의 고통을 대신 책임져주지 않았다고 느끼는 사람에게 타인의 호소는 때때로 불공평하게 느껴진다.
내가 받지 못했던 이해를 왜 저 사람에게는 줘야 하는가.
내가 감당했던 몫을 왜 저 사람은 감당하지 않으려 하는가.
그래서 역설적으로 가장 지쳐 있는 사람이 타인의 고통에 가장 엄격해질 수도 있다.
이것을 단순히 공감 능력의 부족이라고 부르기에는 무언가 부족하다.
공감할 마음이 없는 것이 아니라, 공감에 사용할 여력이 남아 있지 않은 것에 더 가까울지도 모른다.
그리고 서로에게 여유가 없는 사회에서 공감은 점점 비용이 된다.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에도 비용이 들고, 그 사람의 사정을 이해하는 것에도 비용이 들며, 한 사람의 고통을 인정하는 순간 그다음 책임까지 떠안을 것 같은 부담이 생긴다.
그러니 가장 간단한 선택은 서로의 책임을 분리하는 것이다.
“네 인생은 네가 책임져라.”
그런데 이 말이 사회의 기본값이 되어버린다면 조금 다른 문제가 생긴다.
다른 사람의 삶을 바라볼 이유가 없는 사회가 되는 것이다.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각자 살아남느라, 서로를 이해할 힘까지 소진해버린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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